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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론] 미국 이민 반세기

개인적으로 이민 50주년을 맞았다. 옛날을 생각하면 참 아득하다. 그 당시 이민 온 많은 한인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걷으라 생각한다.  나의 개인 이민사지만 내용에 공감하는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1974년 11월의 어느 날 한국, 그해 첫눈이 펑펑 내리는 몹시 추운 날이었다. 포드 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날로 기억한다. 김포 공항에서 생애 처음 비행기를 타고 부모님과 여동생, 이렇게  4명의 가족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잔뜩 겨울옷으로 무장했는데 하와이는 따뜻하고 온화한 날씨였다.       하와이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영주권을 받은 후 다시 LA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LA공항에 1년 먼저 이민 온 고모님과 로즈우드 감리교회 이창순 목사님이 마중 나왔고 우리의 이민 생활은 로즈우드 감리교회로 시작되었다. 그때는 다 그랬다.   원래 나의 계획은 고등학교에 편입해 1년 정도 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만 18세였던 나는 성인이라는 이유로 고등학교 편입이 불가능했다. 미국에서 18세는 성인 취급을 하기 때문에 미성년자들과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법 때문이다. 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임시로 LA 서쪽에 있던 이화원이라는 한국 식당에 버스보이로 취직했다. 버스보이란 식당에서 남긴 음식을 치우고 접시 닦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화원은 고급 한식당으로 할리우드 근처에 위치해 영화배우들도 자주 찾는 식당이었다.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씨 소유로 알려졌었다. 당시 임금은 시간당 2달러가 안 됐지만 팁으로 하루 5달러 이상 받았다.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분들은 팁만 하루 20달러 이상 받았는데 당시에는 고소득이었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이 끝났다. 미군에 협조했던 베트남인들은 사이공을 탈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헬기를 타려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1달 후 나는 미군에 자원입대했다.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영어를 빨리 배우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G. I. Bill’ 즉, 대학 학자금 보조 프로그램 혜택을 받기 위해서였다. 미군에 입대해 3년간 복무하고 전역하면 4년 동안 대학 학자금을 보조해 주는 제도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미군은 징집에서 지원병 제도로 바꾸었는데 입대를 유도하기 위해 파격적인 혜택을 내놓았다. 덕분에 나는 학자금 걱정 없이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입학식 때 서 있는 자세가 삐딱하다는 이유로 군화를 신은 교관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해 주저앉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맞은 부위가 너무 아프고 쓰라렸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군대 문화의 폭력성을 경험한 것이다. 그 이후 교련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자유와 평등을 생각하고 군사 문화, 독재, 폭력을 싫어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내가 자발적으로 미군에 입대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입대를 결심한 후 모병소를 찾아가 시험을 치러야 했다. 시험 문제는 대부분 기계 용구 사용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대부분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뭐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또한 영어 문제지라 읽는 시간에 쫓겨 해독이 불가능한 시험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문제는 4지 선다형이었다. 소위 ‘찍기’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받은 입시 교육 덕분에 4지 선다형 시험에는 익숙했다.  문제를 이해하지도 못했고 용구 그림을 보아도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감’으로 답을 찍었다.     결과는 우수한 성적의 합격이었다. 그리고 위생병으로 입대했다. 당시 미군은 입대 시험 성적에 따라 병과가 결정되었는데 가령 10 Bravo는 보병 병과이고, 91 Bravo는 위생병 등 입대 시험 점수가 높을수록 자신이 원하는 병과에 지원이 가능했다. 나는 가장 좋은 점수대에 해당하여 위생병 지원이 가능했다. 당시 위생병을 지원한 이유는 부모님이 전역 후 의대에 진학하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제대 후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고 현재에 이르렀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미국 반세기 개인 이민사지 이민 생활 이민 50주년

2024-11-18

초기 이민자 애환 서린 스왑밋이 저문다

‘스왑밋(swapmeet)’은 단순한 재래시장이 아니다. 그곳은 생계를 유지하려고 치열하게 살았던 한인 이민자들의 삶과 역사가 녹아있다.   스왑밋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지난 수년 사이 유니언 스왑밋(LA), 알파인 스왑밋(토런스), 사우구스 스왑밋(샌타클라리타), 피에스타 스왑밋(사우스 LA), 서니사이드 스왑밋(프레즈노) 등 유명 재래시장이 잇따라 문을 닫았다.   이런 가운데 LA타임스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LA지역 유명 스왑밋인 슬라우슨 수퍼몰의 한인 업주들에게 마지막 챕터가 다가오고 있다고 지난 8일 보도했다.   이 매체는 “이 스왑밋의 많은 업주가 은퇴를 앞두고 있고 고객층이 온라인 쇼핑으로 이동하면서 스왑밋도 쇠퇴하고 있다”며 “업주들은 그동안 스왑밋에서 오랜 시간 일하며 자녀의 학비 등을 마련했지만, 자녀 세대는 그 자리를 이어받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본지도 8일 이 스왑밋을 찾아가 업주들을 만나봤다. 스왑밋은 80년대 한인 이민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슬라우슨 스왑밋은 지난 1985년에 개장했다.   1988년부터 이곳에서 신발 등을 포함한 가죽 제품 등을 판매해온 크리스틴 나 사장은 올해로 65세가 됐다. 나 사장은 “이곳에서 돈을 벌어 집도 사고 애들도 잘 키웠다"며 “예전보다 스왑밋 상황이 많이 안 좋아져서 2~3년 후에 은퇴하려고 생각 중인데 나에게는 이민 생활의 추억이 깃든 곳”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곳에는 약 120개의 업소가 있다. 이중 한인 업주들이 운영하는 곳은 80여개다. 이곳에는 각종 한식을 파는 작은 한식당도 있다. 그만큼 한인 이민자들의 일상이 자연스레 녹아있는 곳이다.   슬라우슨 스왑밋의 업주들은 4.29 폭동(1992년)의 역사도 거쳐 갔다. 당시 한인 이민자 중심으로 운영됐던 이 스왑밋을 함께 지켰던 건 흑인들이었다.   나 사장은 “그때 이곳도 3주 가까이 문을 닫았었다”며 “한인 업주들과 흑인 경비원 10여명이 스왑밋에 남아 지켜줬는데 폭동은 너무나 큰 아픔이지만 그들 때문에 이곳을 지킬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인 업주들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이민자의 삶이 생생하게 스며있다.   의류매장을 운영하는 티모시 정(75) 사장은 “공항에서 누가 마중을 나오느냐에 따라 이민 생활이 정해진다는 말이 맞다”고 했다.   정 사장은 “1983년에 미국으로 왔는데 당시 공항에 픽업하러 나온 친구로 인해 스왑밋 비즈니스를 하게 됐다”며 “그동안 쉬는 날 없이 일만 했는데 아들 둘은 약사와 바이오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가게를 물려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슬라우슨 스왑밋도 한때 전성기가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주차할 곳이 모자라 고객들이 인근 교회 주차장을 이용할 만큼 북적였다.   다른 스왑밋에 비하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그래도 상황은 낫지만 예전만 못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온라인 쇼핑의 활성화로 젊은 층 고객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데다, 개발 붐으로 인한 건물 철거 등으로 스왑밋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민자에게 스왑밋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한 고된 삶의 현장이었다. 이민생활의 희로애락이 배어있다.   지금은 철거된 유니언 스왑밋에서 식당을 운영했던 이해진씨는 “한인과 라틴계 등 수많은 이들이 스왑밋에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며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며 “스왑밋이 쇠퇴하는 것을 보니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스왑밋에는 한인들의 이민사가 있다. 치열했던 그들의 이민 생활은 이제 추억으로 저물고 있다. 장열 기자ㆍ[email protected]스왑밋 슬라우슨 스왑밋 이민 생활 이민자 LA 로스앤젤레스 장열 미주중앙일보 아메리칸 드림 한인 슬라우슨 수퍼몰 80년대

2024-03-10

[시카고 사람들] 시카고 한인산악회 박영남 전 회장

“건강 관리를 하면서 지금 세계일주용으로 캠퍼 밴을 조금씩 꾸미고 있다”고 말하는 시카고 한인 산악회 박영남(71, 사진) 전 회장.   박 전 회장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그냥 거기에 있으라고 만들어 놓으셨을까요?”라고 반문하면서 “만물과 생명들을 우리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으니 보고 즐기고 감사하며 느끼기 위한 여행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그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산이 좋아 빙벽도 타는 산악 등반, 심장 박동 소리를 들려 주는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모터사이클링, 예전에는 직장 동료들과 꾸준한 골프 아웃팅, 각종 세계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 달리기 운동, 겨울엔 스노우보딩 등 다양한 스포츠와 활동을 즐기는 시카고 한인사회에 몇 안 되는 액티브 맨이다.   박 전 회장이 미국에 온 것은 지난 1975년 2월. 누님 가족이 있는 아이오와주 북동부 미시시피강 근처 목장에서 일한 것이 이민 생활의 첫 직장이었다.   미국에서 목장을 경영하는 것이 아시안 이민자에게는 여러 분야에서 어렵다는 생각에 이민 가방을 싣고 추운 겨울 오토바이를 타고 시카고에 입성한 것은 지난 1976년 1월.   시카고서 신문배달, 개스스테이션, 공장, 메캐닉 등 각종 일을 하며 하루 3~4시간을 자고 쓰리잡을 뛰며 열심히 진짜 이민 생활을 경험했다고 회상한다.   전자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한국에 나가 여자 친구(아내)와 결혼을 하고 시카고로 돌아와 마침내 IBM에 입사해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TRW, Storage Tech 등 다른 회사로 스카우트 되며 미국 기업에서 인정을 받고 지역본부장까지 승진하며 25년을 근무했다.   그는 미국인에게 오직 지지 않겠다는 승부 근성으로 도전하며 경쟁이 심한 컴퓨터 산업 분야에서 한인의 자긍심을 지켜나가겠다는 각오로 일했다고 기억했다.   지난 2005년 자신의 비즈니스를 해보겠다며 세탁공장을 운영하고, 얼마 전까지 코인 런드리 사업을 하면서 그는 스몰 비즈니스를 경영하는 한인들의 부지런함과 근면함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많은 곳을 다녔지만 시카고에 살아 보니 4계절이 있고 맑은 공기에 맑은 물이 있어 깨끗한 생활 환경이 좋다고 강조한다.   힘들었던 이민 생활을 극복해 나가며 생긴 그의 철학은 “내일은 불확실하지만 삶 속에서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기며 오늘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매일 아침 격일제로 7마일을 뛰고 상체 운동도 하며 건강을 관리한다는 그는 아내(박기임)와의 슬하에 모두 출가한 1남1녀(폴⋅그레이스)를 두고 있다.   그는 교회에서 아름다운 신앙인들을 만나며 하나님 앞에 평생 미운 짓 많이 했으니 조금이라도 빚 청산을 해야겠다는 믿음으로 링컨우드 소재 베다니 장로교회에 출석하며 시무장로로 헌신하고 있다.     박우성 위원시카고 사람들 한인산악회 시카고 시카고 한인사회 이민 생활 직장 생활

20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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